
공자는 서른을 일컬어 '이립' 이라고 했다. '모든 것의 기초를 세우는 나이' 라는 뜻이다.
20대에는 '서른이 되면 뭔가 되어 있겠지' 라고 막연히 생각하지만 실은 사뢰호부터 주어진 과업을 해내느라 앞만 보고 달리다 그제야 숨을 고르고, 스스로에게 제대로 말을 걸기 시작하는 나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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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나의 30대는 자주 불안할 것이다.'벌써 서른이나 됐는데 이룬 게 하나도 없어' ,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라는 생각이 자꾸 고개를 내밀 때마다 그 마음을 회피하고 방치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마주하리고 했다.
그 과정은 유쾌하지도 친절하지도 않겠지만 나레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아직은 30대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나이이긴 하지만 30대를 거의 바라보고 있는 입장에서 너무 공감이 되었던 말이다.
특히 저 '서른이나 됐는데 이룬 게 없어' 이 말은 불과 저번주에도 내가 한탄하고 자책하며 했던 말이다.
"서른" 20대초반에는 많이 보였지만 막상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에는 생각보다 어린 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단어이다.
'20대 때 어떻게 살았길래 지금 그 모양이니' 라는 식의 질문을 내 스스로에게 한 적이 많다.
그 대답에 지금의 생각은 내가 가진 선입견과 세상과 진리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느라 많이 아프기도 기쁘기도 후회하기도 슬프기도 했다고 말할 것 같다.
솔직히 그냥 모든 것을 치열하게 살았다고 하기엔 좌절하고 우울해했던 시간이 너무 길다.
그래서 앞에 다른 것들을 한번 넣어봤다. 내가 치열하게 살았다고, 쉽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말이다.
코로나라는 심리적 직격타를 맞아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겪는 이 펜데믹을 나 혼자 힘들다는 듯이 우울해 했고 그렇게 흔들린지 3년이 지난 올해에서야 나를 나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책에 나와있는 말처럼 그대로의 나를 마주하는 일은 정말 유쾌하지 않다. 상상속의 나보다 훨씬 못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조금씩 마주하면서 30대를 준비하는 것 같다.
시험을 잘 보기 위해, 원하는 직업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배우는 게 익숙해지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배운다'는 것의 의미가 내안에서 왜곡되어 버린 것 같다.
'이것을 왜 배우려 하지?'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잊은 채 말이다.
그러다보니 징정 그것을 잘하게 되기도 전에 배우기를 멈추고 말았다.
취미로 배우기 시작한 폴댄스, 걸스힙합 같은 것들도 '한줄안다'는 감각에 도취되자마자 그만둬버렸다.
그래서 배운 것들은 많지만 막상 따져보면 그중 능숙하게 하는 것은 별로 없다.
무언가를 진정 할 줄 안다는 건 스펙도, 높은 연봉을 위해서도 아닌 세상을 즐겁게 살아갈 도구를 하나 더 내 손에 쥐는 일이다.
할 줄아는 게 하나씩 늘어가는 만큼 지금보다 하고 싶은 걸 더 자주하는 주도적인 사람으로 바뀔 것이다.
그 나라 언어를 알면 진정 그 문화에 푹 빠져들 수 있는 것처럼 어디에서 무얼 하든 경험하는 깊이도 달라질테고 말이다.
너무 공감되는 구절이다. 나처럼 다양하게 배우고 싶어하지만 금새 그만둬버리는 사람에게 완전히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처음엔 어렸을 때 배우지 못한 마음을 채우느라 더 배우는 것 자체에 집착하기도 했다. 지금도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게 굉장히 많지만 그것들을 '왜' 배우고 싶냐고 생각 했을 때에는 다음에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이거라면 언젠간 도움이 될 것 같아서인 이유가 먼저 생각나는 것이 순수하게 어떤 것을 배운다는 마음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을 즐겁게 살아갈 도구, 솔직히 그것만을 생각하며 배우기에는 조급한 마음이 나를 설득한다.
그런건 여유가 생겼을 때 배워도 되고 지금은 당장 도뭉되는 것을 배우자고.
그렇게 원하지 않는 것들을 배워가면 살면 여유라는 것이 진짜 올까? 내가 어떠한 마음 가짐을 가지고 어떠한 것을 배워 나가는 게 정답일까? 아니 이 질문에 답은 있나?
하는 복잡한 생각으로 결국 답을 찾지 못한채 끝내게 된다.